서구에 비해 압축적인 공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의 대도시, 특히 서울은 대량생산된 주거 양식의 침략을 받았다.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조한혜정 교수는 이를 ‘블록 어택(Block Attack)’으로 표현했는데, 그는 “온기가 살이 있던 도시마을들은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철근 콘크리트의 고층 주거타워들에 의해 삽시간에 사라졌다”라고 말한다. <편집자 주>

 

이발소.

▲19060~1970년대 도시민의 삶은 지금과 달랐다. 당시 남자 아이들은 아버지 손을 잡고 허름한

이발관을 다니던 추억을 갖고 있다. <사진제공=서울시>


공업화가 막 시작되던 1960~1970년대 도시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6·25 전쟁으로 초토화된 서울은 일자리를 찾아 밀어닥친 사람들로 사람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형태의 도시였다. ‘달동네’로 표현되는 산 중턱의 판잣집들은 도시민의 가난한 삶을 상징한다. 그러나 조한혜정 교수는 이를 “시골 마을에서 ‘마을 살이’에 대한 감각이 있는 이들이 만들어낸 휴먼 스케일 도시적 마을(urban village)”이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마을’은 주민들의 필요에 따라 융통성 있게 바뀌는 생활공간이자 안전성과 친밀성, 기억을 담아내는 장소로 진화하는 중이었다. 당시 학창시절을 보냈던 지금의 30대부터 50대는 이웃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고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술래잡기하며 놀던 기억을 갖고 있다.

 

파편화된 도시인의 삶

 

그러나 1980년대부터 불어닥친 아파트, 재건축 붐은 이러한 도시민이 만든 자발적 형태의 ‘마을 문화’를 붕괴시켰다.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디자인그룹 MVRDV의 창업자이자 디렉터인 위니 마스(Winy Mass)는 “동아시아 지역 조사를 통해 우리가 확인한 것은 주거공간이 주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의 모습, 즉 공간적 풍부함과 사회적 다양성 같은 것을 담아내지 못한 채 재산 증식의 수단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라고 지적했다.

 

도시인.

▲세계 최저의 출산율, 최고의 노동강도, 최고의 청년 자살률과 독거노인 비율을 자랑하는

 서울에 사는 도시인들은 과연 행복할까?


아시아를 조사한 MVRDV팀은 이 도시들이 급속하게 ‘블록’들에 의해 잠식된 현실을 발견하고 이를 ‘블록 어택(Block Attack)’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홍콩과 싱가포르 그리고 서울은 이미 블록들이 도시적 마을을 거의 휩쓸어버린 상태이며 베이징과 상하이는 블록들이 빠르게 퍼져 나가는 상태로 규정했다. 그중에서도 서울은 130만 아파트 단위를 기록해 가장 강력한 블록 어택을 받은 도시라고 보고 있다.

 

밤늦게까지 아이들의 놀이터가 돼주던 동네 골목은 빽빽하게 주차한 차량이 점령했다. 교통사고를 우려한 부모들은 더는 아이들을 골목에서 뛰놀게 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함께 갔던 동네 이발소와 식당, 중고등학생 시절 기웃거리던 헌책방과 만화가게 그리고 재래시장이 있는 마을 중심부는 사라지고 대신 대형 놀이공원과 백화점, 대형마트가 줄줄이 늘어서 있다.

 

조한혜정 교수는 “점점 더 바쁘고 불안해진 이웃들은 아파트 가격이 내려갈 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단지의 출입을 강화하자는 등의 안건이 없는 한 서로 만나는 일이 없다”라고 표현했다. 정부가 주민을 위한 문화센터와 체육관을 짓지만 그것은 시민들을 단순 소비자, 강사와 수강생으로 만들어낼 뿐이다.

 

그러한 현상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아파트 불패, 강남 불패 신화는 아직 꺼지지 않았으며 정부는 DTI 규제 완화 등을 통해 국민에게 ‘더 많은 빚을 내서 아파트를 살 것’을 권유하고 있다. 뉴타운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형태의 재개발 사업은 정치권의 판도를 바꿔놓을 만큼 아직도 큰 파괴력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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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화된 삶을 넘어 공동체적 삶을 꿈꾸는 주민들이 늘고 있다.

무대 뒤의 연출가들이 만든 주거공간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은 충분한 합의를 거치지 않고 단지 정치권과 건설업계의 필요에 의해 추진됐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에게 많은 상처만을 남겼다. 조한혜정 교수는 “이런 분위기를 만든 무대 뒤의 연출가들은 블록 건축을 통해 돈을 확실히 챙길 수 있는 토건업자와 대출 금융계와 정계를 포함한 결탁체”라고 표현했다.

 

서울은 행복한 도시일까? 몇 가지 데이터를 본다면 서울은 결코 행복하지 못한 도시인 것 같다. 세계 최저의 출산율, 최고의 노동강도, 최고의 청년 자살률과 독거노인 비율은 행복하지 못한 삶을 반영한다. 성공모델이라기보다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사회에 가까울지 모른다. 자본주의의 냉혹한 일면은 저출산 문제를 삶의 질이 아닌 ‘노동력 저하’로 바라보는 도구적 사고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경기대학교 건축대학원 이영범 교수는 “대한민국은 아파트 공화국”이라며 “아파트가 돈이라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이 헌 집을 허물고 새집을 짓자고 했으며 이런 논리 때문에 중앙정부의 주택정책들이 펼쳐졌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삶의 장소들이 도시 안에서 공존하지 못하고 현재의 가치에 의해 사람들의 삶터들이 사라지고 있다”라며 “서울은 순간의 역사가 지배하는 도시가 돼가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서울 곳곳에서는 풀뿌리 주민들의 마을 만들기가 진행되고 있다. 핵가족화를 넘어 ‘개인’으로 떨어져 나간 파편들의 공동체적 삶을 다시 회복하기 위한 움직임이 한국의 가장 큰 도시인 서울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도시 재생 움직임이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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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농업은 단순한 농촌체험이 아닌 공동체

만들기의 시작이다.

도시 내 마을은 현재 삶에 불만을 느낀 몇 명의 주민들에 의해 생긴 모임이 자연스럽게 확장되면서 만들어졌다. 이런 확장을 통해 시장적 생산성과 경쟁, 그리고 적대적 관계로 이뤄지는 승자독식적 삶을 지양하고 아이를 키우고 식사를 하며 상부상조하는 공동체적 삶을 꿈꾸는 주민들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조 교수는 “이런 움직임은 개성과 다양성, 협력을 담아낼 수 있는 휴먼 스케일의 주거 공간(마을)의 회복이자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결속력을 동시에 일궈내는 도시 재생 움직임”이라고 표현했다.

 

그런 면에서 도시농업은 단순히 ‘도시인의 농촌체험’이 아닌 공동체적 삶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가족이 함께 모여 텃밭을 일구고 먹을거리를 직접 생산하는 것은 현재의 도시인, 특히 도시에서 태어나 지금껏 자라온 세대에게는 매우 생소한 경험이다. 이러한 경험을 더욱 확장한 생협운동은 도시에 사는 주민들 간의 연대를 넘어 도시와 농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서울뿐 아니라 지방의 중소도시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그 가운데 수원은 지방정부가 공동체적 삶을 회복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실험을 하고 있다. 네이밍 공모를 통해 ‘마을 르네상스’라고 이름 지은 수원의 커뮤니티 디자인은 소수의 전문가 엘리트가 아닌 시민 대중에 의한 집단지성의 잠재력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사례이다.

 

수원시 ‘마을 르네상스’ 추진

 

마을 르네상스는 주민 스스로 지역을 가꾸고 공동체 회복에 참여한 정책으로 점차 주민과 행정, 전문가와 시민사회, 자원봉사자, 대학과 기업이 지혜를 모으는 거버넌스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다. 수원시 이재준 부시장은 “많은 이들이 이러한 시도에 대해 우려를 표했지만 시민들은 사적 이익보다 공적 이익을 우선했으며 시민 스스로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실천 지표를 만들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도시계획, 토지이용계획 등 지금껏 전문가들과 지역유지들이 독점하던 ‘도시 만들기’를 비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시민들에게 넘겼을 때 오히려 대중의 이익에 맞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서울시 역시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지금까지 큰 공원 조성에 주력했다면 이제는 마을 단위의 작은 공원 만들기로 바뀌고 있다. 이와 함께 서울시는 성곽길 걷기, 노들섬 텃밭 체험 등을 통해 시민들이 함께하는 공원을 만드는데 주목하고 있다. 건물 옥상 등에 텃밭을 만드는 등의 마을 공동체 프로젝트를 시행해 어른들뿐만 아니라 어린이도 함께하는 공원 조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서울이라는 도시는 빠른 속도로 확장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확장은 소수의 공동체 만들기 시도나 정치적 결단만으로는 막아내기 어렵다. 조한혜정 교수는 “블록 어택에 대한 반격은 마을을 통해서 가능해진다”라고 말한다. 돌봄 공동체는 개성과 다양성, 집단성과 친밀성, 그리고 유연성이 살아 있는 장소일 것이며 이를 통해 망가진 도시의 삶이 되살아난다는 것이다.

 

또한 마을을 만드는 일은 토건사업처럼 매뉴얼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모여 시행착오를 하는 과정 자체가 마을 만들기이다. 조 교수는 “만약 세금을 가지고 이 일을 하겠다면 성공사례에 지원이 가는 것이 아니라 시행착오 과정의 질을 보고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라고 지적한다.

 

<정리=김경태 기자, 자료=조한혜정 ‘블록 어택(Block Attack)으로 파괴된 도시 커뮤니티 재생을 위한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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