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한 ‘배다리 헌책방 거리’

도시개발로부터 마을 지켜내려는 주민들 노력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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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원역에서 가는 길에 보이는 벽화. 여기서부터 헌책방 거리가 시작된다고 보면 된다.

<사진=안상미 기자>

 

[환경일보] 안상미 기자 = 찬바람이 살랑거리지만 여름의 뜨거운 볕은 고스란히 남은 초가을이다. 걷기 좋은 가을날, 간편한 차림으로 나서기 좋은 곳이 있다면 바로 인천의 ‘배다리 헌책방 거리’다. 인천의 끝자락 도원역 주변에 형성된 헌책방 거리는 故박경리 작가가 헌책방을 운영했고, 일제시대에 설립된 양조장에서 누룩향이 퍼졌으며, 참고서를 싸게 사려는 학생들이 몰려오던 추억의 명소였다. 지금의 헌책방 거리는 유물처럼 남은 추억에 소박한 벽화와 주민들의 노력이 곁들여져 새로운 문화마을로 재탄생해 산책객들의 발걸음을 기다리고 있다.

 

헌책냄새 맡으며 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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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의 역사를 보여주는 벽화

 

반소매 옷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볕이 좋은 오후, 헌책방거리로 향하기 위해 도원역에 내린다. 세무서 방향으로 걸어내려 가는 곳곳에 벽화가 보이면 제대로 길을 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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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말 지어진 ‘인천 기독교사회복지관’

 

벽화를 따라 걷다보면 근대기에 지었을 법한 건축물이 보인다. 이곳은 ‘인천 기독교사회복지관’으로 19세기 말 미국 선교사들의 합숙소였다. 이곳은 북유럽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구조에 조선시대 사원이나 사찰의 승방에 사용했던 용자살 창호와 교살문양으로 만든 창을 짜넣어 서구문하와 전통양식이 적절히 배합한 모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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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아이들의 벽화로 장식된 창영초등학교 벽면. 이곳은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모이는 쉼터가

되기도 한다.

 

그 아래로 창영사회복지관과 창영초등학교가 이어진다. 1907년 개교한 창영초등학교의 벽면은 마을의 역사를 보여주는 내용의 벽화와 아이들이 직접 그린 벽화로 장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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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태 텃밭에 서있는 허수아비. 지난 23일 열린 허수아비 축제에서 주민들이 재활용품으로 만들었다.

 

재활용품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꽂은 생태텃밭에는 코스모스가 가득 피어있어 걸음마다 운치있다. 길의 왼편에는 ‘인천양조’의 옛터가 보인다. 이곳에서 개발한 ‘소성주’는 여전히 인천시민의 사랑을 으뜸으로 받는 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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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이스 빔 앞에 세워진 양철로봇

 

인천양조의 옛 공장 자리에는 공공미술 프로젝트 ‘스페이스 빔’의 마스코트 양철로봇이 우직하니 서있다. 헌책방거리를 찾는 사진 매니아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소품이기도 하다.

 

오랜 것의 가치를 발견한 마을

 

헌책방 거리 일대는 지난 2007년 초, 마을을 반 가르며 지나가는 산업도로 공사라는 위기에 부딪혔다. 수십 년간 쌓아온 도시의 추억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되자 지역 주민과 문화단체, 활동가들이 마을의 문화적 가치를 살리기 위해 대항하기 시작했다. 현재 산업도로 공사는 중단됐으며, 마을을 지키기 위해 모인 이들은 ‘배다리 역사문화마을 만들기 위원회’를 출범해 마을 현안에 대응하고 문화공간과 가게를 통한 마을 활동을 함께 고민하고 있다.

 

특히 헌책방 거리에 위치한 가게들이 각기 특성을 살려 문화마을 만들기에 일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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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벨서점

 

매니아층까지 형성된 ‘아벨서점’은 디지털 미디어의 발달로 쇄락해가는 헌책방의 맥을 꿋꿋이 지켜내는 곳이다. 오랜 역사만큼 다양한 고서적을 보유한 아벨서점은 옆에 주로 전문서적을 구비한 ‘아벨전시관’을 내고 함께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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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아벨전시관 시 다락방에는 윤동주 시인의 고향인 룡정에 있는 룡정중고등학교에서 발간된

 ‘별’이 전시돼 있었다.

 

아벨전시관 2층에 위치한 ‘시 다락방’에서는 정기적으로 책 전시를 하고 있으며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 오후 두시에 시인과의 만남, 시낭송회를 연다.

 

59년째 운영 중이라는 ‘천일사’는 서예용품을 판매하면서 바둑, 장기, 마작 등을 가르치는 곳으로 전통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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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공간 배다리

천일사 옆 건물 2층에는 ‘사진공간 배다리’라는 갤러리가 있다. 지난 5월 헌책방 창고 자리에 문을 연 사진공간 배다리는 사진전시와 초청강연, 사진강좌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며 배다리 문화 조성에 일조하고 있다.

 

장애인학교의 교사이자 갤러리의 주인인 이상봉 관장은 “문화공간이 부족한 인천에 사진전문 갤러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민이 쉽게 사진을 접하고 개인의 역량을 이끌어낼 교육도 여기서 해내려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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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각로신보>를 발행하는 마을사진관 ‘다행’

마을 사진관 ‘다행(多幸)’은 마을소식지 <우각로신보>를 매달 발간하며 주민들과의 문화적 소통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배다리 공예상가 초입에 오랜 시간 방치된 건물과 안쪽주택을 개조해 만든 ‘달이네’에는 책쉼터 ‘나비날다’와 유기농 먹거리가게 ‘작은가게’, 게스트하우스인 ‘손님맞이방’, 재활용가게 ‘벼룩이네’, 뜨개작업실 ‘꽃그늘에서’, 고양이북카페가 함께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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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그늘에서'를 운영하는 장미영씨가 강좌용으로

 사용할 나뭇잎 모양의 장식품을 만들고 있다.

 

이중 ‘손님맞이방’의 관리자는 평소 여행을 자주 다니며 여러 게스트하우스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했고, 타 지역의 활동가들에게 좋은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또 마을사진관 ‘다행’과 ‘달이네’는 매주 토요일 벼룩시장을 열고 ‘되살림 프로그램’과 대안적인 생활문화 확산을 위한 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꽃그늘에서’를 운영하는 장미영씨는 25년째 도원동 주민이다. 장씨는 “세 자녀 모두 이 마을에서 학교를 다녔다. 산업도로 개발로 인해 아이들의 추억이 모두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내가 이 마을의 분위기를 좋아하기도 하고 문화마을 조성에 보탬이 되고자 뜨개작업실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장씨는 정기적으로 뜨개질모임, 무료특강을 열고 골목풍경을 사진으로 찍어 블로그 활동을 하는 등 대외적으로 마을의 모습을 알리는 데 협력하고 있다.

 

이처럼 헌책방 거리는 오래된 것을 치우고 새것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오랜 것의 가치를 보존하고 상승시켜 역사적으로 가꿔가는 마을로 변모하고 있다.

 

문화마을 향한 여정은 ‘진행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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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다리 도시학교 진행 모습

'배다리 역사문화마을 만들기 위원회’의 공동실행위원장이자 ‘스페이스 빔’을 운영하는 민운기 대표는 본격적인 문화마을 조성을 위해 ‘배다리 아카이브 & 디자인’ 사업을 통한 홈페이지 구축, 안내책자 발간, 마을지도 제작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마을의 벽화는 지난 4월까지 퍼포먼스 반지하가 맡아왔으며 마을 축제는 주민과 활동가들이 함께 꾸려오고 있다. 

 

스페이스 빔은 헌책방 거리를 근거지로 도시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배다리 도시학교’를 열어 매달 담론을 벌이며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올해 4월 시작한 도시학교는 매회 30여명의 주민, 도시계획 전문가, 학생, 활동가 등 다양한 인원이 참석하며 11월까지 계속된다. 11월에 학교를 마치면 8회분의 활동을 평가하고 내년도 도시학교를 계획하게 된다.

 

이밖에 20여가구의 주민들이 모여 생태텃밭을 가꾸고 있는데 만남과 소통의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다. 스페이스 빔은 이곳에서 지난 8월 도시캠핑 ‘배다리 밭캉스’를 열어 풀밭사진관, 태양열로 계란 삶기, 우쿨렐레 배우기, 풀밭카페, 양푼비빔밥만찬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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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기업 ‘한걸음 자활공동체’

이 지역의 창영사회복지관에서 운영하는 마을기업 ‘한걸음 자활공동체’도 지역 자원봉사자들의 참여로 활성화되고 있다. 이 기업은 근로의욕이 있는 장애인에게 소일거리를 제공하고 문화·체육활동을 벌여 자립능력을 키워주는 곳이다.

 

이처럼 마을을 지키려는 주민들의 노력으로 헌책방 거리는 조용히, 하지만 쉼 없이 움직이고 변하고 있다. 나른한 오후, 헌책방 거리 곳곳의 문화공간을 방문하고 석양을 등지며 돌아오는 산책에 나서보면 어떨까.

 

coble@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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